만약 1막에서 무대에 권총을 걸어두었다면, 마지막에는 반드시 그것이 발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예 걸어두지 말라.
– 안톤 체호프
https://www.youtube.com/watch?v=zQ1Feczm93A
연극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이 “체호프의 총”이라는 단어를 한 번 쯤은 들어보셨을 것 같습니다. 러시아 연극의 거장 안톤 체호프가 고안해 낸 용어로, 가끔씩 온라인 게임의 아이템 이름으로 나오거나, 영화에서도 패러디 해서 나오는 경우가 있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이전 포스팅인 [슈퍼 마리오 갤럭시 무비]에서 언급하기도 했었는데, 체호프의 총을 제 나름대로 쉽게 설명드리자면, ‘미리 제시한 요소를 나중에 활용하거나 의미 있게 회수한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응? 그럼 복선이랑 비슷한 개념 아니냐구요? 맞습니다. 어느 정도는 복선과 체호프의 총은 원리가 겹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복선은 ‘나중에 일어날 사건을 미리 암시하는’ 연출에 더욱 가깝습니다.

예를 들자면, 가상의 작품의 등장인물 중 하나가 ‘자물쇠를 잘 따는 능력이 있음’이라고 가정하고, 작중에서 이력서나 취조 보고서, 대화 등으로 위 능력을 설명하는 글귀를 의도적으로 관객에게 보여줬다고 합시다. 그리고 스토리가 어느 정도 진행 되었을 때, 이 등장인물이 잠긴 자물쇠를 솜씨 좋게 풀어 극의 갈등요소 해결 같은 연출을 일으켰다면, ‘복선이라는 탄환과 함께 잘 발사된 체호프의 총’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다음으로는 영화 [기생충] 에서 등장하는 ‘수석’을 예시로 들겠습니다. 수석은 영화 초반 기우의 친구 민혁이네 할아버지가 주는 선물로 등장합니다. 단순히 화면 한쪽에 놓인 소품이 아니라, “재물운과 합격운을 가져다준다”는 의미까지 설명되고 기우가 특별한 애착을 보이면서 관객에게 확실히 인식됩니다. 이후 홍수로 집이 잠겼을 때도 기우가 수석을 챙기고, 마지막에는 그것을 들고 박 사장 집의 지하실로 내려갑니다. 그러나 오히려 근세(a.k.a 리스펙 아저씨)가 그 수석을 빼앗아 기우의 머리를 내리칩니다. 즉, 초반에 중요하게 제시된 물건이 후반부의 결정적인 사건에 실제로 사용되고, 작중 극적 연출을 이끌어내는 오브젝트로 활용됩니다. 이것은 복선보다도 ‘무시무시하게 발사된 체호프의 총’에 가깝습니다. 수석이 초반부터 누군가를 해칠 무기로 쓰인다는 암시는 그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복선의 역할을 수행하긴 힘들고, 이것을 의도해서 보여준 다음,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는 오브젝트 중 하나로 사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굉장히 정석적인 예시이긴 하지만, [반지의 제왕]시리즈에서 ‘절대 반지’가 소유자의 마음을 타락시키고, 계속 소유하고 싶게 만든다라는 설명을 작중 여러 인물들을 통해서(최초로 반지를 빼앗은 곤도르의 왕 ‘이실두르’나 그 다음 주인인 ‘골룸’ 등) 설명되고, 점차 반지의 힘에 굴복되는 주인공 프로도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최후반부에서 반지를 버리지 않고 자신이 가지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복선 빌드 업의 회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체호프의 총이라고 보기에는 좀 더 복선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여기에 여담으로, ‘발사되지 않은 체호프의 총’을 흔히 ‘맥거핀’과 연관짓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또한, 아주 틀린 개념은 아니지만, ‘맥거핀’의 경우는 “의도적으로 보여준 오브젝트나 연출 등을 나중에 큰 상관이 없어도 괜찮게 만들고,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갈등 심화”에 가깝습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펄프 픽션]이 ‘발사되지 않은 체호프의 총’이 아니라 ‘훌륭한 맥거핀’의 예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작중 인물인 빈센트와 줄스는 마르셀러스 월리스의 서류 가방을 되찾기 위해 사람들을 죽이고, 마지막 식당 장면에서도 가방은 강도 사건과 줄스의 선택에 관여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가방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끝까지 보여주지 않습니다. 타란티노 감독 역시 내용물을 확정하지 않고 관객이 각자 판단하도록 남겨두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즉, 가방 안의 내용물을 장황하게 설명했다면 오히려 영화의 초점이 흐려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관객이 정말 봐야 할 것은 가방 속 물건이 아니라, 그 가방을 들고 다니는 줄스가 어떤 인간으로 변하는가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이전 포스팅에서도 언급했던 [슈퍼 마리오 갤럭시 무비]에서 쿠파 주니어가 제작한 파괴병기 ‘붐스데이’는 아주 약간 ‘맥거핀’의 범주에도 들어가 있지만, 좀 더 “발사되지 않아 관객을 실망시킨 허무한 체호프의 총”에 가깝습니다. 붐스데이는 은하를 파괴할 수 있는 병기라는 구체적인 기능과 위력을 강조하며, 관객에게 언젠가 그 위험성이 실제로 드러날 것이라는 기대를 만들어냅니다. 물론 붐스데이가 이야기에서 완전히 방치된 것은 아닙니다. 로젤리나의 납치와 최종 결전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는 분명 서사적 역할을 수행했죠. 문제는 그렇게 거창하게 장전한 총을 제대로 쏴보지도 못한 채 허무하게 부숴버렸다는 겁니다. [펄프 픽션]과의 중대한 차이점은, [펄프 픽션]에선 그 서류 가방의 정체가 무엇인지 굳이 알지 않아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고, ‘붐스데이’는 그 위력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이로 인해 반드시 막아야 하는 목적성을 부여하지만, 정작 그 위력을 실제로 보여주지 않아 ‘허무함’, ‘답답함’, ‘진짜 그렇게 강한 병기였을까?’ 같은 의문스러움을 안겨 준 것은 관객에 따라 매우 마이너스적인 요소로 평가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당장에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등장하는 ‘데스 스타’의 경우가 ‘붐스데이’가 갔어야 할 모범 예시였죠. 데스 스타의 행성을 한 큐에 파괴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관객과 극중 인물들에게 ‘진짜로 막지 않으면 대재앙이 펼쳐지는 것을 목격시키는’ 총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연출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자세히 보면, 수많은 팬들에게 사랑을 받은 작품일수록, ‘체호프의 총’을 잘 활용한 예시가 드러납니다. [진격의 거인]에서 아빠 그리샤 예거가 아들 에렌 예거에게 지하실 열쇠를 주고, 그것이 후반부의 모든 진실을 알게 하는 오브젝트로 활용되고, 영화 [반지의 제왕]의 1편, 반지 원정대에서 프로도가 받은 선물들인 ‘미스릴 갑옷’은 바로 창 공격을 막아내는데 쓰이고, 갈라드리엘이 준 선물인 ‘에아렌딜의 빛’은 아무 언급이 없다가 3편 왕의 귀환에서 거미 쉴롭에게서 도망칠 수 있는 필살기 아이템으로 활용되며, 총은 훌륭하게 발사가 됩니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스타워즈]시리즈는 물론이요, 마블 시네마틱[어벤져스]시리즈에 등장하는 ‘타노스의 건틀릿’도 어마어마한 사이즈로 잘 발사된 체호프의 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작품이 체호프의 총을 멋지게 발사시켜서 인기를 얻은 것은 아니지만, 인기가 많은 작품들을 분석해 보면, 훌륭하게 발사된 체호프의 총의 탄흔이 보이는 원리 입니다.

체호프의 총을 무조건 작품에 넣고, 발사시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펄프 픽션]은 되려 그것을 맥거핀화 해서 되려 인물들의 변화와 갈등에 포커싱을 맞추는 지혜를 선보였습니다. 그러나, [펄프 픽션]과 같은 훌륭한 맥거핀화를 이뤄내지도 못하고, 이도 저도 아닌, 총은 보여줬는데, 불발이 나는 총은 관객을 쉽게 지치게 하고, 맥 빠지게 하는 요소임은 부정하기 힘듭니다. [달링 인 더 프랑키스]에서는 외계 집단에 대한 떡밥은 무수히 뿌려놓은 다음에 이름하여 ‘태극 엔딩’으로 인과관계도 없이 갈등을 해소시켰고, [데스노트]의 경우는 ‘정말 총이 없으면 악역의 완벽한 승리’인 것처럼 꾸며놓고, 제반니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아 ㅋㅋ 실은 하루만에 총이랑 총알 다 만들어서 왔어요. 이제 쏠게요~!”라는 식으로 전개를 해서 매우 많은 팬들의 어이가 상실되었었죠. 제반니가 똑똑한 인물인 것을 작중 소개한 것은 체홉의 총을 보여준 것이나, 마지막에 총도 없고, 화약도 없고, 총알도 없는 진짜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작가가 제시해 놓고, ‘제반니가 하룻밤만에 다 해냈습니다’로 발사시키는 것은, 발사시키지 않는 것보다 더한 예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체호프의 총은 여러 개념들, ‘복선’, ‘맥거핀’, ‘페이오프’ 등등의 개념들과 공통되면서도 독립된 연출법이자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완전히 이것은 체호프의 총이다! 라고 설명하기 보단, 여러 개념들과 어우러지며 작중 효과적인 장치로 넣는 개념이죠. 그리고 이것을 잘 사용만 한다면,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나 몰입감, 주역들의 행동원리에 대한 공감, 깔끔한 스토리 전개 등을 보여주기 쉬워진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올 대작들에게선 또 어떤 체호프의 총이 발사될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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