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구의 운동에 대해서] -주인공은 죽지…않는 거 맞죠?-
*본 포스팅 특성상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시는 분은 주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2t_68WJPKE
21세기 지구. 우리들은 ‘대부분’ 지구는 동그랗고(정확히는 미묘한 타원),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배우고 있습니다. 일부, ‘지구평평론자’들 또는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과 다른 행성들이 돌고 있다는 ‘천동설’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 [지-지구의 운동에 대해서(이하, [지])]의 세계관에서는, 지구가 태양주위를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주장하는 순간, 이단으로 사로 잡혀서 바로 사형을 당합니다.
지금은 지동설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천동설이나 지구평평설을 믿는 사람들을 개그취급하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올바른 것을 이야기 해도 사형, 올바르지 않지만 ‘집단’의 의사에 반하는 이론을 제시하면 끔찍한 고문과 함께 사형당하던 시절을 그립니다. 즉, 우리는 지금 얼마나 복받은 타이밍에 살고 있는지 이 작품을 보다보면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 [지]의 첫 화부터 나오는 주인공 ‘라파우’는 아주 똑똑한 소년입니다. 그래서 초중학생 나이임에도 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죠. 근데, 자신을 거둬 준 의부의 심부름으로 만난 사람 때문에 지동설을 알게 되고, 당시의 교회가 진리처럼 외치는 ‘천동설’이 틀렸음을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동설 사상이 퍼지는 걸 막기 위해 교회에서 파견되는 이단심문관들이 무슨 룽게 경감 뺨치듯 귀신같이 반동분자들을 색출해 내서 사형대에 올립니다.
결국, 의부의 고발로, 라파우는 잡혀들어갑니다. 그리고 모진 고문을 받기도 전에 순순히 불고, 작중 최강자 라인에 서있는 이단심문관 앞에서 당시 기독교에서 가장 금기시 하는 ‘자X’을 시도합니다. 저는 이 작품의 원작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무언가의 서술트릭으로 라파우가 지동설을 얼마나 멋지게 퍼뜨릴까 생각하고 다음 화를 봤습니다.
응? 근데 갑자기 10여년 뒤로 점프하네요? 아니 그러고 라파우가 죽은 게 진짜로 사실이라네요? 네??? 주인공이 등장하자마자 3화내로 죽는다고요?? 아아, 페이크 주인공이겠구나? 이게 프롤로그고 본론이 이제 시작되는 거죠? 약간 [죠죠 시리즈] 같이 말이죠.
그래서 2부 처럼 보이는 장면에서는 검투사 오크지가 별자리를 관측하는 선배와 지동설을 연구하던 이단자의 말이 계기가 되어 지동설 연구에 합류하게 됩니다. 그리고 고죠 사토루의 목소리를 가진 하후돈 성직자가 이 지동설의 미스테리를 본격적으로 풀고, 이단심문관의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딸이 어시스트를 펼치며, 지동설이 완성되어 갑니다.
아뿔싸! 하지만 10여년 전에 라파우를 체포한 그 이단심문관이 바로 오크지와 성직자를 붙잡는데 성공합니다! 그럼에도 이 지동설을 펼칠 무언가의 장치가 되어있겠지? 하는 순간, 두 캐릭터가 확실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는 장면을 여지없이 묘사해 줍니다.
그리고 또 20여년이 흐른다고 합니다…? 대체 주인공이 몇 번이나 바뀌는 거죠? 아니 이런 작품은 정말 듣도보도 못 해서 신선하기까지 합니다!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라는 작품의 불문율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작품 같았습니다. 보통 다른 작품 같으면, 조력자의 등장이나 미리 준비한 트릭, 하물며, 운 등으로 살아남아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야 할 것 같은데, 무슨 [죠죠 시리즈]의 한 시즌이 끝나는 것처럼 바로 세대가 교체되어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그런데 여러분, ‘일수사견(一水四見)’이란 말을 알고 계신지요? 뜻을 풀이하자면, ‘하나의 물을 보는데 4가지의 관점이 있다’라는 뜻 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물을 보고 “마실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물을 보면 “파란 종이”처럼 보이고, 물고기는 물 속에서 “내 집”이라고 보며, 물에 닿으면 죽는 생물에게는 “죽음을 부르는 무언가”로 볼 것 입니다. 즉, 하나의 현상이나 오브젝트를 가지고도 여러가지 시선과 관점이 있다는 뜻이죠. 이를 바탕으로, 이 작품의 주인공은 바로 ‘캐릭터’가 아니라 다른 곳에 관점을 두어야 이 작품 또한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의 불문율을 지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단어에도 함정이 있습니다. 주인공(主人公), 한자에서 사람 인(人)이 들어가 있으니, 사람에 먼저 집중을 하게 되겠죠. 그러나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지동설’ 또는 진리를 밝히려는 자들의 ‘의지’로 풀이 됩니다. 이 작품에서 진짜로 주인공이 죽었다면, 라파우가 죽고 10여년 뒤, 지동설과는 아예 상관없는 주제의 이야기가 진행되어야 합니다. 근데 그렇게 되면, 제목인 [지-지구의 운동에 대하여]는 일절 상관 없게 되고, 작품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으니, 굳이 그런 짓을 해서 편집자에게 욕먹고, 작품이 출하당하는 바보같은 짓을 작가님이 왜 하겠습니까?
즉, 편히 설명해서, ‘지동설’이라는 이름의 의지가 담긴 주인공은 라파우, 오크지 등의 의지에 의해서 계속 시대를 흘러 살아남고, 그 영향력을 발휘 합니다. 직접 관측하지 않고, 그저 성경에 위반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진실을 부정하는 시대에 정면으로 대항할 전략병기가 되는 지동설의 매력. 그것에 홀린 사람들이 또 그 세대의 서브 주인공이 되고, 그대로 진주인공인 ‘지동설’의 성장에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라는 불문율은 어찌보면 당연한 구성입니다. 주인공 자체가 작품 그 자체이며, 주인공이 죽으면, 작품의 이름을 바꾸거나, 시즌을 바꿔야 합니다. 그래서 주인공이 죽어도 보통은 에필로그 부분에서 작품의 여운을 주기 위해 죽거나, [지]처럼 주인공이 죽어도, 그 의지를 이어받아 새로운 주인공(의지가 진주인공, 그 의지를 잇는 서브 주인공 등)이 탄생하며, 계속 이어가기 때문에,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는 성립되는 겁니다. 그 의지도 인물도 이어지지 않는다면, 작품은 더 이상 그 제목의 작품으로써 성립할 수 없는 모순이 생겨버립니다. 페이크 주인공 등, 서술 트릭 등이 있을 수 있지만, 작중에서 주인공 역할의 바통터치가 유기적으로 이어가면서, 작중 주인공의 계주는 계속 됩니다.
예외 같이 보이는 장르로서는 ‘옴니버스’를 들 수 있겠으나, 이 또한, 엄밀히 따지면,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가 성립이 됩니다. 대제목 안에서 군소 에피소드들이 독립된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이 장르는 한 화 한 화가 작품이며, 그 작품의 주인공의 일대기만 보여주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옴니버스 또한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가 작은 에피소드별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 입니다.
이처럼, 일수사견의 자세를 알게 해 주는 재미난 작품입니다. 지동설 천동설 자체와 역사적 배경으로 넘어가면, 찬반논란이 심한 종교 문제 등으로 번질 수가 있어서, 어디까지나 작품 연출적인 면으로만 조명을 하고, 주인공의 정의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