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영화속 철학, 이렇게 이야기 해 보았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카르네아데스의 콘크리트 판자

G.Mario 2024. 1. 17. 04:29

 *본 포스팅 특성상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원치 않으시는 분은 추후에 포스팅을 읽어 주시거나, 지금 읽으실 때 주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소년탐정 김전일에서 묘사 된 '카르네아데스의 판자' 삽화 중 일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카르네아데스가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 사람을 태운 배가 암초에 걸려 난파하게 되었습니다. 바다에 빠진 한 사람은 난파선에서 흘러나온 판자를 붙잡고 겨우 바다 위에 떠 있을 수 있었죠. 그가 붙잡은 판자는 한 사람을 겨우 지탱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미처 붙잡을 만한 것을 찾지 못하던 다른 사람이 헤엄쳐 와 그가 의지하고 있던 판자를 붙잡았습니다. 두 사람까지 지탱할 만한 부력이 없던 판자는 이내 가라앉으려 했고, 이에 둘 다 빠져 죽을 것을 염려한 그는 헤엄쳐 온 사람을 판자에서 밀어내어 결국 한 명은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답니다. 그런데 말이죠, 목숨을 건진 그는 재판을 받고 무죄 판결을 받게 되어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n8iOH801Y&ab_channel=%EC%9E%84%EC%9A%94%ED%99%98

솔직히 그 어떤 판단을 내리기도 힘든 카르네아데스의 3연벙(아니다)

 

 위 이야기는 오늘 날에도 카르네아데스의 판자라는 용어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다만, 여태 소개해 드렸던 테세우스의 배트롤리의 딜레마보다 더욱 현실에서 일어나기 쉬우며, ‘트롤리의 딜레마와 다르게 본인의 생명이 걸려있는 주제가 되기 쉬움과 동시에, 그 어떤 선택에도 참작하기도, 손가락질 하기도 힘들다는 점이 큽니다. 당장에 우리들의 일상에서 접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무려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유명한 [스타크래프트] [워크레프트] 시리즈 등이 스토리를 제외하고, 게임 방식이 딱 카르네아데스의 판자의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게임 맵 내에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더 많이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상대를 전멸시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이하 ’)]는 조금 다른데요, 이유는 에서의 자원, 즉 미니언이나 골드 등은 무한으로 제공되기 카르네아데스의 판자와는 결이 다릅니다. ‘카르네아데스의 판자로 비유할 수 있는가 없는 가의 가장 중요한 척도 중 하나는 개인적으로 한정된 공간이나 자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AO9a1xSo3M&ab_channel=%EB%A1%AF%EB%8D%B0%EC%97%94%ED%84%B0%ED%85%8C%EC%9D%B8%EB%A8%BC%ED%8A%B8

 

 그런 와중에 여기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있습니다. 영화 자체도 굉장한 수작이지만, 주연 배우들의 미친 듯한 연기가 확 다가오는 영화였습니다. 웹툰 원작의 영화이지만, 원작과는 좀 더 다른 부분이 많으므로 영화만 봐도 충분하고, 좀 더 카르네아데스의 판자를 잘 표현 한 것이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로 보입니다.

 

어떤 면에선 게임 [프로스트 펑크]와도 닮아있습니다.

 

 한국에 닥친 미증유의 대재해. 그 정체 조차도 알 수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된 한 겨울에 황궁 아파트 하나만이 남았습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파괴된 문명 안에서 인간이 목숨을 연명할 수 있는 공간은 턱없이 부족하고, 물과 식량도 녹록치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카르네아데스의 사고실험(思考実験)처럼 물 위에 뜬 판자에 두 사람이 엉겨 붙으면 판자는 가라앉아 공멸(共滅)엔딩만이 뻔히 보일 정도 입니다.

 

연기의 신

 

 

언제나 정치질 당하는 힐러(?)

 

 여기서 대립하는 두 중인공이 나옵니다. 최소한 공멸을 피하자는 황궁 아파트 대표로 선출된 영탁과 어떻게든 다 같이 살 길을 찾아보자는, 아무리 그래도 여기는 아파트지, 판자가 아닐 거라고 주장하며 이타적인 노선을 타는 명화 입니다. 두 캐릭터 다 일리가 있고, 제작진은 또 황궁 아파트가 대재해 이전에 주변 부자 아파트 사람들에게 차별을 받고 있던사람들이라는 개연성의 부여, 외부인들이 아무리 생명이 걸린 일이라고 하지만 맨 처음에는 아파트를 열어준 입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장면등을 보여주면서 외부인들을 콘크리트 판자에서 떼어 내자는 의견에 타당성을 부여하고, 관객의 공감을 얻습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정말 안타깝고 아무 힘도 없는 어린아이들을 자기 자식처럼 돌보며, 힘들 때 일수록 인정은 빛날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명화라는 캐릭터도 그 나름성의 타당성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기본적인 정치이념인 민주주의 투표방식으로 외부인들을 추방하자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언뜻보면 이번에도 '웃으면서 00하는 연기'를 보여준 것 같은 표정과 감정연기

 

 다만, 입주민을 내보내고 날이 가면 갈 수록, 이름하여 수렵(또는 약탈)’으로 얻을 수 있는 성과는 저조해지며, 입주민들의 반발과 스트레스는 더더욱 강해집니다. 결국, 영탁은 이러한 극한의 상황에 꼭 게임 [프로스트 펑크]에서 군사적 정치 테크트리를 타는 것 마냥 철권정치를 내세우며, 입주민들의 단결과 집단화를 꾀 합니다. 물론, 거기서 명화는 계속 반대하는 입장이며, 그럼에도 이타적인 노선을 탈 수 있지 않을까 주장합니다. 그러나 관객들의 일부는 이 기점서 부터 명화라는 캐릭터에 공감을 점점 느끼기 힘들어지고, 영탁에게 동화되어 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감독과 제작진의 연출적 미스 또는 한계였다고 봅니다만, 명화는 영탁과 정찰조들이 목숨을 걸고 살을 에는 추위와 각종 위협들로 부터 겨우 얻어온 식량으로 연명을 하면서 외부인들에게 무조건 적인 선행을 베푸는 모습에 어느샌가 아파트 주민에 동화가 될 정도로 몰입한 관객들은 명화가 일명 발암 캐릭터 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솔직히 이렇게 고생을 하는데 명화(박보영役)도 한 번 원정 갔다와야 했다.

 

 거기에 영탁은 알고 보니 입주민이 아니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억울한 상황에 놓여 이 황궁 아파트에 입주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사기였으므로 서류상의 주민은 아니었고, 본래의 집주인(사기꾼)을 죽이고, 그 집주인의 이름과 정체마저 전부 빌려서 행세를 한 것입니다. 아무리 억울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살인을 저지른 극악 범죄자이며, 원래 집주인의 시신을 유기했는데, 하필 그것을 명화가 새로 등장하는 캐릭터와 함께 진실을 파헤칩니다. 그리고 그 진실을 발표하는 시점이 하필이면 본인의 남편을 포함해서 아파트 내의 가장 큰 무력을 가진 정찰조가 큰 습격을 받아 부상을 당한 상태였고, 정신이 없는 와중에 폭로전을 실시했고, 아비규환 패닉상황에 외부인들 연합이 쳐들어와 아파트는 함락당하고, 남편을 결과적으로는 잃게 되었습니다.

 

또한 연출상의 문제 중 하나가, 명화의 트롤링을 만해(卍解)아니, 만회하기 위해 민성(박서준役)이 타락하는 것 처럼 묘사가 됩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명화에 대해 공감을 실패하게 되는 관객들이 생겨났다고 보고, 감독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라고 할 지라도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일단 살기 위해 판자에 다가오는 사람을 밀어내는 것에 대한 타당성에 대해 더욱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연출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영탁은 작중 초반부에서 황궁 아파트에서 20년간 일했지만 입주민은 아닌 경비 아저씨를 같이 내쫓는 장면에서부터 영탁의 베드 엔딩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물론, 영화를 초회 관람하는 입장에서는 서술트릭(영탁이 외부인이 아니라 아파트 사람처럼 인식한 것) 때문에 알 수는 없었지만, 만약, 영탁이 경비 아저씨 만큼은 아파트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면 본인의 정당성, , 아파트를 거의 먹여 살리다 싶이 했는데 외부인이더라도 인정은 받아야 하지 않나, 라는 논리를 본인 스스로 초반부터 걷어 차 버린 것입니다. 물론, 이것 또한, 아파트 경비원이라는 직업상, 그리고 우왁지게 큰 아파트 단지가 아니라 딱 1개 동만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그 동만 케어해 왔던 경비 아저씨가 실제 김영탁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니, 자신의 범행이 들킬까 우려해 쫓아낸 것일 수도 있겠다는 추측이 듭니다.

 

1번 항목의 정당성 확보냐, 아니면 범행의 은닉이냐. 죽음의 이지선다

 

다만, 이러한 연출 가운데 조금 조심스럽게 접근해서 포스팅 하고 싶습니다만, 이 작품은 역사적인 대사건인 세계 2차대전의 중심이었던 나치독일의 모습과 굉장히 흡사합니다. 먼저, 당시 독일의 나치당과 미대 떨어져서 권총살자한 콧수염(이하, 콧수염)의 데뷔와도 닮아 있습니다. 세계 1차대전의 패배로 막대한 빚을 진 당시독일은 디스토피아나 다름없는 풍경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와중에 독일인도 아닌 오스트리아인콧수염이 선전장관 괴벨스의 공작과 더불어 나치당의 총통으로 거듭나고, 세계 2차대전으로 독일인(아리아인)의 우월성을 내세우며, 타민족에 대한 학살을 자행합니다. 그리고 나치독일 내부에서 공산주의자나 유대인을 포함한 타민족을 도와주고 옹호하는 자들을 색출해내기도 했죠. 거기에 세계2차대전 말기에 연합군에게 베를린 함락 직전임에도 지하벙커에서 장군들에게 다 계획이 있다. 반격만 성공하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라고 말하고, 얼마 안가 최후를 맞이한 콧수염의 모습과 영탁의 대사들이 맞물립니다. 그러는 와중에 나치독일 안에서 마지막까지 이타적이며 전제주의의 눈을 피해 양심을 실행한 쉰들러 같은 소수의 선인들 또한 있었다는 것을 명화라는 캐릭터로 표현한 것이 눈에 띕니다.

 

??? : 됐어! 그냥 생닭 사다가 집에서 튀겨먹을 꺼야!

 

 , 영탁의 방식은 굉장히 나치즘과 맞닿아 있으며, 영탁의 배경이나, 확성기를 들고 선전을 하는 부녀회장의 몰아가기로 대표가 되는 과정이 굉장히 그 역사를 따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이야 지나간 역사이고, 나치는 나쁘다, 옹호해서는 안 된다라고 우리가 교육을 받았으니, 나치라고 하면 바로 부정적인 뉘앙스를 띄는데, 은근슬쩍 스리슬쩍 이름과 심볼, 배경만 좀 바꿔 두고, 세계1차대전 직후의 독일에 사는 독일인 같이 관객을 대입시키면 정말 쥐도새도 모르게 그러한 전제주의에 공감하고 있는 풍경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말로는 선동에 빠져선 안 된다고 하지만, 불을 지피는 가마솥 안의 개구리 마냥 우리가 알지도 못 하는 사이에 우리가 손가락질 하던 역사의 인물들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과연 누가 영탁을 욕하고 누가 명화를 욕할 수 있을까요.

 

어떤 면에선 최승호 시인의 시<북어>와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감독과 제작진이 명화를 그려내는 것에는 성급한 연출이 있었던 아쉬운 점은 있었지만, 배우 이병헌 씨의 초특급 명연기가 한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영탁의 퍼포먼스와 아파트 주민들의 모습에 관객들이 알게 모르게 스며들게 한 점은 정말로 극찬할 부분 중 하나 입니다. 특히, 여담으로 본 영화에서는 개인적으로 봉준호식 냄새가 엄청 풍겨 오기도 했습니다. 감독 인터뷰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작진이 혹시 오마쥬를 한 게 아닐까 싶은 장면들도 보였죠. 예를 들어, 영탁이 택시기사 모세범이었던 과거를 회상하며, 실제 집주인 사기꾼 김영탁을 죽이고, 이제는 주민 대표가 되어 승승장구하며 노래 아파트를 부르는 장면에서는 봉준호 감독의 [마더]엔딩 부분의 시사와 연출이 닮아 있었습니다. [마더]에서 배우 김혜자 씨가 맡은 주인공이 모든 기억을 잊는 침을 자신에게 놓고, 자아를 잊은 채 광란의 춤을 추는 것처럼, [콘크리트 유토피아]살인의 추억을 되새기던 모세범이 이제 모세범이었던 자아를 버리고 [마더]의 석양처럼 비추는 발전기 랜턴의 빛과 어둠 가운데 주민들과 같이 섞여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장면은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였습니다. 거기에 확성기를 들고 아파트에 대한 충성과 규율을 강조하는 부녀회장은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에서 나오는 여총리, 외부인들을 몰아내고, 무슨 공익광고 영상 같은 부조리 시퀀스를 보여주는 장면과 예상치 못하게 돌아온캐릭터의 등장으로 한순간에 극의 상승곡선을 루나코인 마냥 나락으로 떨구는 연출과 스토리텔링 기법은 [기생충]과도 비슷한 냄새가 났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c_RT91AQ4A&ab_channel=%EC%94%AC%EC%8A%A4%ED%8F%AC%EC%9D%BC%EB%9F%AC 

지상 최고의 명장면

 

https://www.youtube.com/watch?v=mqm1UBSKklo&ab_channel=%EB%A1%AF%EB%8D%B0%EC%97%94%ED%84%B0%ED%85%8C%EC%9D%B8%EB%A8%BC%ED%8A%B8

원본 영화에서는 이렇게 부르면서 과거회상을 하다가 

 

이런 식으로 줌 아웃되며 이웃들 사이에 섞이는 연출이 나옵니다. 되게 [마더] 같았습니다.

 

 마무리로, 다시 카르네아데스의 판자 이야기로 돌아오면, 본 작품은 일단 판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 속 이야기와 배경이 실제라면, 이렇게 공멸로 가기전에 인간의 역사를 잘 활용하면, 남은 폐자재를 모아 판자가 아닌 뗏목을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일단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우뚝 서게 될 수 있던 계기는 실제로 이타성에 있다고 합니다. 이타성을 좀 더 풀어서 키워드 나열을 해보면, ‘사회복지’, ‘약자보호’, ‘나눔’, ‘봉사’, ‘희생등이 있을 수 있으며, 약자들의 삶이 보장받는 사회이기에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본인이 언젠가 약자가 될 때를 대비한 보험 개념과 약자 또한 커버가 가능하다는 강한 사회에서 느끼는 신뢰 등으로 사회에 공헌을 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고아원의 아이들에게 맛있는 음식들과 아낌 없는 지원을 해주던 무명의 자선가가 어느 날 큰 사고를 당했을 때, 그를 집도해서 살려낸 의사가 자신이 돕던 고아원 출신의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일터에서 평생을 일하고, 정당한 납세로 사회에 공헌한 사람이 일을 못 하게 되었을 때 사회로부터 제대로 된 보장을 받을 수 있다는 신뢰감은 납세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보험의 개념으로 다가와 공헌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줄 수 있습니다. 현 지구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종교인 기독교&가톨릭, 이슬람, 불교, 유교 등은 그 기원전 시대서 부터 복지의 개념을 설파했습니다. 구약성서를 공유하는 종교들에는 병자와 약자를 돌보는 시스템, 불교에서는 업보의 개념으로 약한자를 괴롭히지 않고, 불우한 자를 돕게 했고, 유교에서도 인과 예와 효를 들어 노인에 대한 공경과 베품 등을 미덕으로 가르쳤습니다. 그 고대시대서 부터 이타성과 복지 등은 단순한 ()’의 개념으로 퍼뜨린 것 뿐만이 아니라, 인간사회가 강해질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효율적인 방법임을 수천년에 걸쳐 증명되어 온 것 입니다.

 

노인공경 끝판왕 봉보로봉봉봉 감독님. 그는 도덕책...

 

 그렇기에 작중에서 외부인들과 같이 최대한 노동인력을 확보해서 폐자제를 이용해서 최소한 동사는 막을 수 있는 천막의 건설에 몰두하고, 합리적인 법령의 절대성 확보와 행정 및 치안조직 결성, 그리고 외부인들의 성과가 좋으면 좋을 수록 일을 해 준 만큼 식량을 더욱 배급을 하는 등의 포상으로 스트레스를 조절하고, 경비 아저씨의 힘으로 효율적인 인력 관리 및 아파트 시설 교육 등을 맡길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초반에는 알 수 없지만, 작중 중후반부에 아파트 단지에 기적적으로 수원이 터져 물 자원이 확보가 되는데, 여기서 운의 요소가 있지만, 정찰조들이 감자나 씨앗 등을 확보 하게 유도하고 바로 농업을 실시해야 했습니다. 농사법에 관련되어선 입주민이나 외부인이나 관련 지식이 있는 사람이 있을 확률이 높으니, 그 사람들의 지시에 맞춰 농지를 만들고, 기초적이더라도 농사를 실시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류는 농업혁명으로 신석기 시대로 진입하였으며, 이제 한정된 자원이 아닌, 영구적인 자원의 획득으로 카르네아데스의 판자에서 졸업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저의 상상이고, 운의 요소 또한 배제할 수 없기에 어디까지나 이론이지만, 명화의 이타적인 방법으로도 충분히 카르네아데스의 판자를 개조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이렇게나 해줬는데도 반란을 일으킬려는...저혈압 치료제 게임

 

 영화를 관람하고 나서 아직도 문제가 쏙쏙 나오고 있는 순살X빼먹X, 정말 기가차서 먹먹해집니다. 저 황궁 아파트가 어떤 의미에서는 새삼 부럽습니다.